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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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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보잡을 듣보잡이라 부르지 못하고 헤스티아의 신전 - 일상

진보논객 진중권 '듣보잡'에 유죄선고

호듣호잡을 하지 못하니

듣보국이라도_세워야할_기세.asf

<동의보감>과 부정수소외래(不定愁訴外來), 한의학과 서양의학의 오랜 떡밥 아테나의 신전 - 사유

의사협 '세계유산 동의보감' 딴죽


0. <동의보감>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인류의 위대한 문화적 유산 중 하나인 <동의보감>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기뻐할만한 일이고, 또한 조선시대의 '의서'가 하나의 문화로서 인정받았다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의학적으로도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동의보감>외의 다른 의서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 몇 가지 있을만도 한데). 의사협회는 아니나다를까 여기에 축하인사를 보내면서도 은근히 딴지를 걸어왔다. 이걸 계기로 한의학이 세를 펼치는 것을 견제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살짝 뒤집어 생각해보면, <동의보감>은 의서다. 의서를 '문화유산'으로서 지정했다는 것은 한의학을 과학의 카테고리가 아닌, 문화의 카테고리로서 집어넣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는 추론을 해볼수도 있다. 사실상 의학계에서 한의학에 대한 신뢰도는 거의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의학은 의학이 아니다'라는 의견을 적극 개진하고 있는 한정호 의사와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예다.

내과의사 한정호의 의료와 사회 : 심근경색이란 있지도 않은 병을 의사들이 돈벌려고 만들었다?

진화생물학에 대해서 재미있고 유익한 글을 쓰시는 블로거인 漁夫님께서도 한의학에 대한 글을 몇 가지 올리셨다.
의학과 한의학에 대한 개인의견
의학과 한의학에 대한 개인의견(2) - 漁夫님

그리고 이에 자극많은 많은 블로거들이 또 이에대한 엄청난 양의 포스팅을 하였고, 이에 대해서는 漁夫님이 정리해두신 트랙백을 넘기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의학-한의학 논의 ; posting thread 정리 - 漁夫님

...이정도만 해도 이게 작은 떡밥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겠지.

이어지는 내용

2010년 포스팅 계획 헤스티아의 신전 - 일상

0. 2010년은 마지막 대학생 시즌이다. 04년도에 입학할때만 해도 내가 졸업을 할 날이 올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뭐 임고 준비상태로 보아서는 올해 합격은 역시 힘들거 같은데, 뭐 일단 3월부터는 좀 마음먹고 준비를 해야하기 때문에(Must...) 그리고 논문이 2학기에 있고, 장학금이 보장되지 않는 초과학기인 2학기 등록금 문제가 있고 하여튼 뭐 이래저래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2010년은 악몽의 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1. 하지만 포스팅은 좀 계획적으로 늘려볼 생각이다. 어쨌든 글을 쓰고 읽는 것은 취미이기도 하고 당위성이 있기도 하다. 당위성...이번학기에 야심차게 써서 냈던 A4 10장짜리 레포트 세 개가 있는데, 셋 다 그다지 호평을 받지 못했다. 하나는 레포트라기보다는 정리-발표문에 가까웠으니 그렇다치고, 하나는 좀 대충 써서 낸 것이 내 눈에도 보일정도인데, 하나는 나름대로 집중해서 구상을 가지고 썼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사실 그 이유는 대충 써서 낸 레포트의 교수님에게서 대면으로 호되게 들었다. "과다인용"...지식의 틀 밖에서 사고를 전개하지 못한다는 것은 글쟁이로서 치명적인 약점이다. 분석하고, 정리하고, 배치할 수는 있지만 창조하고 생산해내지 못한다.

"머릿속에서조차 스스로를 감시해대다간 퇴화하고 퇴화해서 결국엔 시시한 인간이 될 뿐이다. 교육으로 세뇌된 감성따위가 자신의 진짜인 줄이나 아는 시시한 인간 말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나? 넌 지금 상상하는 것조차 지식 따위에나 의존하는 바보란 소리다."

- 백서현, <데이브레이커> 2권

......그렇단다. 최소한 내가 내 문제의식을 파악해내고 그것을 기존 지식에 적용할 수 있을때까지는 또 읽고 읽고, 또 쓰고 써야 한다. 뭐든 읽어야 문제의식을 찾을테고, 그것을 써 내야 내 것이 될테니까. 읽고 비판하는 과정이 자연스러워질 수 있도록. 공부는 공부고 이건 이거니까.

2. 그래서 2010년에는 몇 가지 포스팅을 준비하고 있다. 포스팅을 무려 준비씩이나 해서 쓴다는 것도 처음이고 이 많은 것을 쓸수나 있을까 사실 걱정이 앞서지만 뭐 페X비X처럼 하나도 못쓰고 끝나진 않겠지(아니 하나는 썼던가? ㅋㅋ) 일단 계획은 다음과 같다.

1) 번역 관련 포스팅
    - 수유 + 너머 기획세미나 Ithaca 관련 포스팅
    - 번역 이론 : 사카이 나오키, 발터 벤야민, 로렌스 베누티 서적 비평
    - 번역 실제 : Fredric Lane, <Venice : the maritime republic>
                       John Dryzek, <Deliverative democracy and beyond> 5, 6챕터

   : 어쨌든간에 꾸준히 하게 될 번역과 번역의 문제에 관련된 여러 지점들에 대한 포스팅. 사카이 나오키 선생이 6월쯤에 오실 예정이라니 뭐 그것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수도 있겠고. 번역 내용은 양이 어느정도 차면 조금씩 포스팅 할 예정. 아마 계획된 포스팅 중 가장 빠르게 진행될 듯.

2) 도시사(공간사)와 식민주의 포스팅
    - '공간'이 가지는 정치성과 식민성
    - 도시 공간사 : 유럽 / 동아시아 도시 공간의 변천과 그 안에서 보이는 정치적 - 사회적 변화
    - 근대 도시계획가 : 르 코르뷔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미스 반 데어 로에 리뷰
    - 식민주의와 도시 : 제국주의의 도시 개조가 가져오는 제국적 근대와 식민성
       도시공간별 분석 -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 가장 큰 프로젝트가 될 도시 공간과 정치성에 대한 문제. 이것은 2학기 논문과도 이어질 주제라서 공부를 많이 해야 할 주제기도 하다. 일단 준비 기간을 좀 가지고 빨라도 한 6월 경? 부터 포스팅하게 될거고 그렇게 빨리 진행되지는 않을 예정. 어쨌든 최초의 역사 관련된 대형 포스팅이 되는 만큼 두근두근. 과연 이걸로 역사 블로그로 변신할 수 있을 것인가?

3) 라이트노벨과 현대문학 포스팅
    - 라이트노벨? 문학성? 대중적 유희?
    - 라이트노벨 리뷰 : 악마의 파트너, 문학소녀 시리즈, 안녕 피아노 소나타, 풀 메탈 패닉
    - 환상문학 리뷰 : 보르헤스? 
    - 문학과 문학성에 대한 고찰
    - 오덕과 오덕성에 대한 고찰

    : 나랑 가장 멀고(?) 그리고 가장 지지부진할 포스팅들. 순수문학보다는 라이트노벨에 더욱 친밀한 독자로서 라이트노벨이 문학에서 갖는 의미, 또는 대중문화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서 좀 생각해보고자. 리뷰할 라이트노벨은 이미 다 완독한 거지만 보르헤스는 언제 읽을지...

4) 기타 다수 포스팅
    - 임고 준비 일기
    - 논문 준비 일기
    - 교생실습 일기
    - 이기중 선본 구의원 선거 및 지방선거
    - 태, 탬파베이!
    - 기타 등등

     : 일기 시리즈 세 개는 좀 꼬박꼬박 써 볼 예정. 임고 준비는 2월부터. 논문준비는 7월부터. 교생실습은 5월 한달. 뭐 기타로 이것저것 집적접적. 탬파베이는 경기를 계속 보고 싶긴 한데...볼 수 있는 경기정도는 리뷰를 해볼까도. 구의원 선거는 빡세게 활동...은 당연히 못하겠지만 뭐 그냥 좋은 떡밥이니까.



......이래서 무슨 임고. 때려쳐 그냥.
뭐 임고를 때려(치지는 않겠지 아마)치든 이걸 때려치든 분명 시즌 중 하나는 때려칠듯 ㅋㅋㅋ

연애와 성적 욕망 - 근대를 상징하는 강철장벽 아테나의 신전 - 사유

0. 이제 고전이 된 개그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연애로 시작해서 연애로 끝난다. 뭐 사실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연애에 관련된 모든 내용을 빼버린다면 남는 내용은 '혈통의 비밀' 밖에 없을 정도로 연애가 드라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Drama는 극, 극이란 곧 현실을 모사한 예술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러한 연애 담론이 우리 주변의 현실에도 차고 넘치고 있다는 사실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솔로의 장점은 수십개를 넘어서 수백개가 있지만, 커플의 장점은 단 하나다. "솔로보다 낫다." 연애 지상주의, 인간의 가치를 연애로 환산하여 보는 시각은 굳이 이제와서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굳건하다.

 아, 물론 드라마에서 선남선녀들의 알콩달콩한 사랑 이야기를 보는 것이 하나의 즐거움이고 대리만족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그것을 제공하는 한국 드라마계를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 드라마를 즐겨보는 편은 아니지만 나도 지성과 김민정의 포옹장면을 보면서 열폭했고 현빈이 성유리를 기억하고자 저 먼 설산으로 가는 장면을 보며 찌릿한 사람이다(군대에서긴 하지만). 한드보다 자주보는편인 일드에서는 사실 그렇게 가슴이 두근댈만한 연애 드라마가 많지 않은지라(우리나라 드라마 관점으로 보자면 <사랑따위 필요없어, 여름> 정도가 그나마 합격선? 일드는 섬세한 감정선의 묘사가 장점이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연애 관계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다.) 굳이 연애 요소가 있는 드라마를 찾아다니기도 하고, 최근 10년간 우리나라 드라마 중 주인공간의 연애 요소를 거의 도입하지 않은 유일무이한 드라마인(내가 국내 드라마를 다 본건 아니지만 거의 장담할 수 있다. 이런 드라마는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옥션 하우스>를 보면서 2%의 부족함을 느끼기도 했다. '내 일이 아닌' 연애를 구경하는 것은 재미있다. 때로는 동경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오면 나는 그저 연애 못해서 열폭하는 찌질이가 되고 만다.

 <나비와 전사>에서 고미숙은 이러한 '연애'를 과감하게 근대의 특징으로 규정짓는다. 사실 일부일처제의 관계가 구성되기 시작한 것이 극히 최근부터임을 생각하면 이것은 당연한 결론일 수 있다. 아, 물론 근대 이전에도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이라는 것은 존재했다. 예를들면 '춘향전'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춘향이를 숱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이몽룡에 대한 정절과 사랑을 지키는 순정파 여주인공으로 흔히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고미숙에 따르면 이러한 이미지는 사실 근대의 신소설, 이해조의 <옥중화>에서 생긴 것이다. 오히려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이 훨씬 조선시대 춘향전에 가까운 춘향이를 묘사하고 있다. 고미숙이 춘향전을 평가한 부분을 보자.

판소리에 나오는 춘향, 특히 완판본 <춘향전>에 나오는 춘향은 절대 요조숙녀가 아니다. 요즘으로 치면 '작업'에 능수능란한 프로다. 그네 뛰면서 처음 보는 남정네와 눈이 맞은 것도 그렇고, 눈을 맞춘 그날로 바로 합방을 하는데, 어찌나 테크닉이 뛰어난지 눈이 휘등그레질 정도다. 한마디로 춘향은 남자를 한방에 휘어잡는 도발적 여성형이었던 것. 이몽룡이 한양으로 떠나고 난 뒤 주변에 집적거리는 군노며 포졸들을 다루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다. 그런데 바로 이 도발적 역동성이야말로 이몽룡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지키게 해준 원동력이 아닐까. 만약 춘향이 통상적인 '요조숙녀'였다면 이몽룡과의 '번개같은' 사랑도 쉽지 않았을테고, 사랑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기도 불가능했으리라.
- 고미숙, <나비와 전사>, p.208


 자, 이 춘향, 결코 모던적 일부일처제에 길들여진 순종적인 여성이 아니다. 처절하게 수절을 외치는 춘향은 우리의 기억과 이해조의 각색속에만 있을 뿐, 원본속의, 그리고 조선시대의 시공간속의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한 명의 전사다. 그녀는 스스로의 애욕을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삶과, 그리고 사랑과 연결시킨다. 애욕과 순결한 사랑을 분리시켜 부정한 애욕이 아닌 순결한 사랑을 지키고자 하는 근대의 수많은 '춘향이들'과는 본질부터 다른 존재다.

 그렇다면 근대의 춘향이는 왜 정절을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지키려고 하는가? 그것은 순결이 그녀의 삶 전체를 결정짓는 기제이기 때문이다. 아니, 순결이 그녀의 삶 자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고미숙은 근대에서 사랑이 현대의 연애 지상주의로 변주되는 부분이 바로 여기라고 지적한다. 어린이용으로 개작된 춘향이는 보면 오직 수절을 위해서 태어난 여성같다. 이몽룡을 기다린다기보다 이몽룡을 기다리는 자신을, 자신의 삶을 찬양하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다. 연암 박지원은 이를 두고 한탄하였다. "열렬하기는 열렬하지만 이 어찌 과한 일이 아니겠느냐?" 그렇다. 과하다. 근대의 춘향전에서 춘향이의 정조는 춘향이의 삶 자체와 치환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 살아간다. 수절하기 위해서 이몽룡과 사랑한다. 결과와 과정이 뒤집힌 것이다.

 연애는 근대의 산물이다. 과거의 사람들은 '사랑'을 '연애'라는 제한된 형식으로 표현한 적이 없었다. 원본 춘향전처럼, 사랑한다면 닥치고 셐ㅋ스ㅋ 가 차라리 정답에 가깝다. 사랑과 성애는 삶과 아주 근접하게 맞닿아 있는 욕망이었다. 내가 즐겁고 싶기때문에 사랑하고, 성적 욕망을 실현시키고, 또 헤어진다. 이러한 당연한 것들이 근대에 와서는 연애라는 형식에 맞추어 변주된 것이다. 독립 신문에서는 이러한 '자유연애'의 형식을 논설에서 자세히 묘사한 적이 있다(1896년 6월 6일 논설). 이 부분을 고미숙이 해석한 방식으로 한 번 읽어보자.

먼저 만남은 주로 "나이 지각이 날 만한 후에 서로 학교든지 교당이든지 친구의 집이든지 모꼬지 같은데서" 이루어진다. '지각이 나기 전에는' 절대로 멋대로 성관계를 맺어서는 안된다. 아무데서나 눈이 맞아서도 안 된다. 학교나 교회, 친구의 집, 파티장같이 시선을 통제할 수 있는 공적인 곳에서만 사인을 주고받아야 한다.
그 다음, 남녀가 서로 "사랑할 생각이 있을 것 같으면 그 부인 집으로 가서 자주 찾아보고 서로 친구같이 이삼년 동안 지내"보아야 한다. '사랑할 생각이 있을 것 같다'니? 아마도 호감을 갖는다는 의미인가보다. '한방!'에 눈이 맞아서도 안되고, 눈이 맞는다고 바로 성적교합을 해서도 안된다. 이삼년간은 족히 참아내야 한다. 그 때에서도 "만일 서로 참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 같으면 그때는 사나이가 부인에게 자기 아내 되기를 청하고 만일 그 부분인 그 사나이가 마음에 맞지 않을것 같으면 아내 될 수가 없노라고 대답하는 법"이다. 청혼을 하는 것은 남자쪽이지만, 여성의 의사를 전적으로 중시해야 한다는 것

.

- 고미숙, <나비와 전사>, pp.174~175

 참으로 흥미롭지 아니한가. 근대적 사랑은 연애로만 실현되어야 하는데, 이는 오직 저렇게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만 '자유로울 수' 있다. 어딜 어떻게 생각해도 만난 첫 날 눈맞아서 바로 합방에 들어간 춘향이가 훨씬 자유로워보인다. 우리는 근대에 접어들어 신분, 계급, 재산, 학력, 국경 모든 것을 뛰어넘어 '자유롭게' 사랑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사실 드라마와 듀오를 살펴보자면 그것조차 아니지만! 계급과 재산과 학력이 얼마나 우리의 '사랑'을 가로막고 있는지는 듀오가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허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는 어딜보아도 삶과 분절된 '형식'이며 '제도'이다. 우리는 연애라는 형식이 아니라면 사랑조차 할수 없는 세대가 되어버렸다.

근대성을 상징하는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분절성'이다. 근대는 모든 것을 이성의 잣대에 맞추어 '갈라놓았다.' 이웃으로 살던 두 마을 사이에 국경이 생기고, 아무렇지도 않게 꿈속을 헤메는 시간 사이에 '자정'이라는 구분이 생겼다. 아무것도 아닌 그 하나의 선이 사회를 제도화하고 형식화한다. 이는 사랑도 마찬가지다. '성애'와 '사랑' 사이에 넘사벽이 세워지면서, '성애'는 욕망으로 취급되고 '사랑'은 연애로 승화되었다. 연애하지 못하면 사랑조차 맘대로 못하는 세상! 결혼하지 못하면 섹스조차 맘대로 못하는 세상! 모든 사랑이 연애로 치환되면서, 연애하지 못하는 이들은 사랑하지 못하는 이들로 무시된다. 재산도 계급과 학력도 국경도 뛰어넘는 '낭만적 멜로'가 아니면, 그런 '운명적인 사랑'이 아니라면 그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닌가? 헛소리!

 당신은 이미 사랑하고 있다. 삶과 사랑은 유리될 수 없다. 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이미 많은 것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운명적으로 만나서 현실적인 벽에 부딪히지만 결국에는 다시 만나 빰빠밤빰빠밤 결혼하는 그 또는 그녀에게만 쓰여야 하는 신성한 단어는 아니다. 연애만큼이나 모든 것에 열정적이고 모든 것을 사랑하라. 근대적 제도를 넘어선 사랑의 열쇠는 바로 그곳에 있다.

덧. 쓰고나니까 엄청 쪽팔린 글이다. 하지만 쓴 시간이 아까워서 그냥 올린다.

덧의 덧. 기본적으로는 고미숙의 <나비와 전사>의 논지구조를 베끼다시피 차용했음을 알려둔다.

덧의 덧의 덧. 내가 연애를 못해서 열폭하는 글은 아니다(응?)
 
 

간단간단 최근 앨범 리뷰 판의 신전 - 음악

0. 앨범 리뷰 한지 오래됐네...

1. 윤하 3집 Part.B <Growing season>
발라드 앨범이라는 타이틀에 어울리지 않는 강렬한 곡으로 시작하는 앨범. 그 첫 넘버가 앨범 전체를 지배할 정도로 좋은 곡이라는 것이 행운이자 불행. 바로 뒤에 있는 타이틀곡 '오늘 헤어졌어요'도 충분히 좋은 곡이나 'say something'의 위엄에 눌렸다. 타이틀의 미스배치를 제외하면 좋은 앨범. Part.A 뒤에 나왔으니 뭐라도 안좋겠냐마는. 하드한 비트의 곡과 어쿠스틱 팝, 발라드가 적당히 버무려진 최근 경향에 잘 맞춘 구성이랄까. 베스트 넘버는 1번 'say sonething'과 3번 '좋아해' 6번 'LaLaLa'. 발라드 앨범이지만 발라드보다 다른 곡들이 더 좋다는 것이 비극.

2. 페퍼톤스 3집 <Sounds Good!>
New hippie generation 이후 대략 1년 반만의 앨범...은근히 시간 오래 걸리는거 같으면서 뚝딱뚝딱 만들어낸다. 2집보다는 1집으로 회귀한 느낌. 훨씬 귀에 잘 달라붙는다. 'Ping-Pong'같은 특이한 시도들이 귀에 들어오는 앨범. 하지만 페퍼톤스는 역시 원래 잘 하던게 좋다. 아는 선배는 여자보컬들이 노래를 참 못한다...고 했는데 그 말 듣고 보니 나도 남자보컬 노래가 더 기억에 남는듯. 베스트 넘버는 4번 '공원여행' 6번 '지금 나의 노래가 들린다면' 8번 '작별을 고하며'(그런데 꼽고보니 여자보컬 노래만 두 곡이네;)

3. 레오나 루이스 2집(맞나?) <Echo>
'Bleeding love'로 한 때 강렬한 충격을 주었던 그녀의 새 앨범. 흑인 특유의 풍부한 음량과 다채로운 기교가 돋보였던 1집...에 비해 딱히 특이한 점이 없는 2집은 그저 평범한 팝 앨범으로 보인다...5번 트랙인 'outta my head'같은 곡이 그래도 특이하고 좋다. 특징을 잡아내기 어려운 팝 싱글의 집합. 추천 트랙은 5번 'outta my head'과 9번 'naked'

4. 노라 존스 4집 <The Fall 2009>
제목과는 달리 11월에 발매된 앨범. 노라 존스는 1집과 2집을 갖고 있고 3집만 없는데, '대중적 재즈'를 모토로 걸고 나온 만큼 일반인이 그나마 듣기 쉬운 음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래도 재즈는 어렵다......클래식을 제외한다면 내가 제일 어려워하는 장르라서 친해지기 쉽지는 않다. 아마 1집만큼의 호응을 얻기는 이후 앨범에서도 쉽지는 않을듯.

5. 제임스 모리슨 <Undiscovered>
윤하짱 추천앨범 1. 허스키하고 기억에 남는 목소리를 내뿜는 팝 앨범. 뭔가 현대적인 팝이라기보다는 비틀즈 시절의 올드 팝 느낌이 강하게 난다. 낮게 깔리는 베이스가 음반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도 특징. 팝으로서의 완성도는 높은 듯. 거부감 없고 쉽게 들을 수 있다. 베이스기타가 있다면 치면서 부르면 딱 좋을 만한데...우리에게 아주 잘 알려진 곡으로는 2번넘버 'You give me something'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5번 'one last chance'와 6번 'undiscovered'를 추천.

6. 제이미 컬럼 <catching tale>
윤하짱 추천앨범 2. 일단 재즈로 분류되어있긴 한데 듣다보면 피아노 팝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강한비트가 섞여 들어오는 몇몇 곡들에서는 더욱. 노라 존스가 1집으로 이룩했던 재즈의 대중화를 이룰 정도는 아니지만 쉽게 접할 수 있는 재즈 음악으로는 추천할만 할듯. 윤하짱이 콘서트에서 말했듯 피아노 연주가 꽤 매력적이고 베이스와 좋은 조화를 이룬다. 3번 'photograph' 7번 '21st century kid', 10번 'catch the sun' 정도가 추천넘버.

13~14세기의 베네치아, 제노바와 해상지배권

키오자 포위전의 함포? - Luthien님

0. 본 논문은 2005년 2학기 수업에서 <서양지역사특강>이라는 수업을 수강할때 과제로 번역했던 논문이다. 아직까지 국내 유일의(!) 중세 지중해 무역사 전공자이신 동국대 남종국 교수님의 수업이었는데, 교재 전체에 한글이라고는 표지와 선생님 자신의 논문 딸랑 하나 -_- 여서 번역해서 읽는거 자체가 수업의 주를 차지했었는데...마침 내가 번역을 맡았던 논문은 내 취향에 맞게도 중세 해상전을 중심으로 한 주제를 갖고 있어서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그리고 영어가 좀 쉬웠다) Luthien님의 블로그에 들어갔다가 위 글을 보니 갑작스레 그 논문 생각이 나서, 어차피 번역도 안된 논문이겠다 그냥 한번 올려본다. 대학교 2학년생이 번역한 논문이니만큼(무,물론 6학년인 지금 나아졌다는건 아니지만 -_-) 엄청난 오역과 실수, 오타가 반복될 수 있으니 그냥 참고 수준에서 읽어보실분은 참조하시길...

나름대로 역사 전공을 하는 학생이고 사실 블로그 만들었을때는 이것저것 역사 관련 포스팅을 올려보자는 생각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쪽 포스팅을 하려면 준비를 많이 해야해서...6년동안 블로깅을 했는데 역사 카테고리에 들어있는 글은 딸랑 세 개인가...-_- 앞으로는 조금씩 늘려나갈 생각이고, 뭐 정 안되면 썼던 레포트라도 몇 개 올려볼까 고민도 하고 있으며, 조만간 조금 큰 프로젝트를 가동하는데 블로그에 조금씩이나마 진행과정을 올리면서 역사 카테고리를 채울 예정이다. 일단은 첫 타로 4년전에 번역했던 논문부터...볼 사람은 보든가 ㅋㅋ


논문 내용

으으 추워 헤스티아의 신전 - 일상

지난주부터 몰려왔던 강추위가 나갈 생각을 하지않네.
심지어 집에 있을때도 은근히 추울때가...

무엇보다!

윤하가 감기에...........................ㅠㅠㅠㅠㅠ


가수 윤하, 신종플루 가능성 제기, 고열증세로 입원 - 이뉴스투데이



감기 조심하세요

새해벽두부터 아테나의 신전 - 사유

노동조합법 날치기 통과, 그리고 조승수 의원 발언 - Picketline님

잘하는 짓이다.
4대강 예산안...노동조합법...국회 왜 만들었나? 야당은 왜 있나?
그냥 솔직히 내년에는 총통제 통과시켜서 진짜 '가카'가 되는 건 어때.

동성애, 호모포비아, 레즈비어니즘 아테나의 신전 - 사유

동성애에 대한 혐오를 말할 권리? - 노정태님
호모포비아같은 저주받은 인종은 다 죽여버려야 됨 - 라세엄마님
그러면 실제 동성애자의 생각을 한번 볼까? - Lad님

0. 원래 ozzyz님의 듀나게시판에 대한 글에서 촉발된 논쟁인데 호모포비아로 넘어가는 이유가 뭔지...듀게가 '동성애 옹호적'인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에서 호모포비아 척결로 논쟁이 심화된 이유가 참 궁금하다. 디씨 스갤에서 ㅋㄲㅈㅁ가 대세라고 해서 콩을 까지 못하게 하기때문에 디씨가 문제라고 비판하는 사람은 없잖아.

1. 근본적으로 동성애는 성적 취향이 맞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느냐'에 대한 문제를 도덕성 문제로 환원시키기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동성애가 지금까지 문제가 되어왔던 이유는 그것이 '취향'이 아닌 것으로 취급받아왔기 때문이다. 터부는 당위성의 문제다. 따라서 취향에 대해서는 도덕적인 비판이 불가능하다는 명제가 참이라고 가정했을때 동성애를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당위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어느쪽이든 취할 수 있고 이에 대한 비판이 타당하지 않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이런 부분에서 핵심을 잘 짚어내는 보수 블로거인 아리아리랑님의 글을 보면 대중문화에 대한 '고급문화 종사자 / 영위자들'의 일종의 우월감이나 호모포비아에 대한 혐오가 사실상 같은 위상에서 표출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취향은 존중해야한다. 여기에는 특정 취향을 싫어할 권리도 물론 포함된다. 동성애를 충분히 싫어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동성애자도 이성애를 충분히 싫어할 수 있다.
 
2. 하지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던가. 동성애는 싫어할 수 있어도 동성애자를 싫어하는 것은 곤란하다. 소몰이 창법을 싫어할 수는 있지만 김준호를 싫어하게 되면 - 아니 정확하게는 혐오하게 되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모독으로 갈 수 있다. 그 사람의 취향을 존중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남들이 동성애하는 것, 싫어할 수 있다. 동성애자가 나에게 고백하는 것, 싫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유로 동성애자를 혐오하게 되면 그것은 취향 자체에 대한 부정이고 '이성애'라는 당위적 기준을 세우는 것이 된다. 이것은 문제가 된다.

3. 게다가 이런 혐오를 공공장소에서 또는 다른 사람에게 표출하게 된다면 그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된다. 이것이 바로 노정태님이 말하는 명예훼손이 될 것이다. 소몰이 창법은 싫지만 그 창법을 구사하는 가수에게 '너 ㅂㅅ아냐?'라고 묻는다면 바로 다음날 법원에서 편지가 날아올지도 모른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이성애자는 동성애자를 충분히 공개적으로 싫어할 수 있지만, 동성애자가 이성애자를 싫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것은 섹슈얼리티 파워, 곧 성별권력이다. 클래식이 대세이던 18세기에 비틀즈가 등장했다면 그들이 과연 취향으로 존중받을 수 있었을까? 심수봉이 활약하던 시대에 김준호가 과연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까? 권력없는 집단은 곧 취향도 없다. 이러한 미시권력의 시각으로 접근하면 호모포비아에 대한 문제는 곧 정치적 논쟁으로 변환된다.

4. 성소수자에 대한 배려는 곧 이러한 권력 불균등을 해소해보자는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Lad님의 글에서 등장하는 두 명의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에서 분명 옳은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동성애자가 아닌 사람이 호모포비아를 비판하는 것은 사실 양쪽에 있어서 취향의 문제에 간섭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호모포비아적 분위기에 눌려서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가 있다면 이것은 정치-권력의 문제로 환원되어 취향을 넘어선 무언가가 된다. 이글루스에 '호모포비아라는 취향을 존중해야 한다'는 글은 난무하지만 '동성애의 성적자주권'이나 '이성애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인정해야한다'는 글은 (당연스럽게도) 올라오지 않고 있다. 올라온다해도 조용히 묻힐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이것은 이미 권력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싸움이고, 실제 성적 소수자의 문제 - 권력이 없는 사람들의 취향은 저 멀리 떨어져 있다. 

5. 듀게의 문제로 돌아가보면, 듀게에는 호모포비아적인 발언을 몰아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나는 듀게에 안들어가서 잘 모른다) 이것은 '호모포비아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취향의 게시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이에 대해서 비판할 건덕지는 아무것도 없다. 호모포비아가 취향이라면 호모포비아를 싫어하는 것도 취향이다. 콩까는 것이 취향이라면 콩을 까는 것을 까는 것도 취향이다. 특정 취향의 사람들이 가득 모인 디시는 '존중이라능 취향해달라능'이라며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데 나름대로의 취향을 고수하는 듀게가 비판받을 이유는 없다. 관련된 포스팅의 댓글을 읽어봐도, 상당수는 "듀게가 다양성을 존중하는 게시판이다"라는 지점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지, '듀게 동성애 집단 모여서 ㅂㅅㅈㄹ라는 곳임 ㅋㅋㅋㅋ'이런 댓글은 (물론 있지만) 몇 없다. 원본 글에서 말하는 '다양성'의 문제도 다르게 해석해볼 여지가 있다. 호모포비아 취향을 드러낼 수 있는 게시판은 인터넷에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호모포비아를 싫어하는 취향'을 드러낼 수 있는 게시판은 사실상 몇 없다. 인터넷과 사회 전반적인 의미에서 해석한다면 듀게는 다양성의 산실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른 방향의' 의견을 표출하는 다양성의 한 방향으로는 해석할 수 있다. 사회 전체의 권력 분배의 시각에서 본다면 듀게는 분명 다양성의 일부다.

6. 1969년 Stonewall Inn 사건은 동성애자들의 정치적인 의견을 표출한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Stonewall이라는 여관에 모여서 조용히 취향을 즐기던 동성애자들에 대해서 경찰이 탄압을 가하고 한 레즈비언을 체포하자 동성애자들이 다수 일어나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1969년까지만 해도, 경찰이 레즈비언을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잡아가도 말을 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대한민국 국회에는 동성애자가 단 한명도 없다. 이것은 분명 '정치적 불균등'의 상황이고, 민주주의 사회의 이념에서 정치적 다수자는 소수자에 대한 배려를 할 의무가 있다. 호모포비아 취향의 표출은 따라서 충분히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것이다. 이에 의해 정치적 소수자가 자신의 취향을 표출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우리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취향을 존중하는' 사회가 아니었던가?




덧. 이러한 정치적 불균등의 문제는 좌파 내에서도 발생한다. 제목에 당당히 걸어놓고 한마디도 하지 못한 레즈비어니즘이 바로 여기서 촉발된 것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레즈비언들은(자신이 레즈비언이라고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사람들은) 페미니즘 운동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만으로는 의미있는 목소리를 구성하기가 어려웠고, 당시 페미니즘운동은 레즈비언들과 목적(가부장제 타파와 같은)이 일치하는 바가 분명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어느정도 궤도가 잡히고 NOW같은 집단이 결성되자 그 내부에서 레즈비언들의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이를 당시 페미니즘의 거두인 베티 프리던은 '보라색 위협(Lavender manace)라 칭하며 경계했다. 이에 이들은 그들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로 결심하고 페미니즘 계열과 다른 방향의 운동노선을 독자적으로 개척하며, 페미니즘 내부에서 페미니즘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필자가 본문에서 '동성애적 취향'이 아닌 '호모포비아를 싫어하는 취향'이라고 굳이 언급한 이유는 이와 같다. 두 가지는 서로 다른 정치적 의견이고, 사실상 그 목적에 있어서 일치하는 바가 있을 수는 있어도 '호모포비아를 싫어하는 취향'의 사람들이 모두 동성애자는 아니기 때문이다.(그래서 Lad님 글에서의 그러한 비판이 나올 수 있는거고)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정치적인 목소리를 섬세하게 잡아낼 필요가 있다.

덧의 뎟. 반은 농담이고 반은 진담인데, 사실 동성애를 싫어하면 몰라도 무서워할 이유는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 동성애자들이 뭐 전염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에게 고백할까봐 무섭다고 하는데 보통 그런 사람은 동성애자 취향이 아닌 경우가 많다(...) 모든 남자가 짐승이 아니듯이 모든 동성애자도 동성을 보면 무조건 고백해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동성애자들은 '정치적 불균등' 상황에 처해있기 떄문에, 그런 고백에 있어서 훨씬 소심하고 신중하게 접근하는 경우가 태반이다.(많은 남자들이 일단 대쉬하고 보자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니 주변에 동성애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고백해오지 않는 이상 이를 무서워할 이유는 사실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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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대통령, "8ㆍ15가 마지막, 임기내 범법자 사면ㆍ복권 없다" 중대발표 - 경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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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말이나 못하면.

1. 삼성의 힘은 이쯤되면 왕국 수준 아닌가. 뭐 이건희가 그렇게 순순히 잡혀들어갈거라고는 생각 안했지만 단독 특사라니.

2. 이정도쯤 되면 삼성에 대한 써킹은 거의 봉신 수준인데. 강남에 빌딩이라도 하나 받기로 했나.

3. L'État, c'est moi! 내가 곧 가카이니라. 가카의 법치주의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정말 이쯤오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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